어제 대학교때 활동했었던 동아리의 10주년 행사에 다녀왔다. 멋쟁이사자처럼이라는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할 때 괜시리 웃음이 나오는 이름의 동아리였는데 비전공자들에게 코딩을 가르쳐 원하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동아리였다. 2015년에 나는 진로를 로스쿨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호기심에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2년 뒤에 프로그래밍 쪽으로 진로를 정하도록 용기를 내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동아리의 성격상 IT스타트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기 때문에 실제로 창업을 했거나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런 네트워킹 행사는 암묵적으로 개발자 구인자와 구직자가 뒤섞인 리크루팅 행사의 성격을 띄었다.
나는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뒤풀이에만 참석했는데 파릇파릇한 아이들 사이에 끼기 멋쩍어 서로 아는 고인물들끼리 앉아 자조적인 나이드립이나 치고 놀 무렵 운영진에게 걸려 새내기들과 자리를 섞게 되었다. 자기 소개를 하다보니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스타트업 씬에 일하고 있었고 신기한 스타트업들도 많았다. 기억나는 곳들만 해도 사주 팔자 플랫폼, 패션 중고거래 플랫폼, (사행성 이슈로 아직 한국에서 서비스가 안된다는;) 스포츠 카드 게임 회사 등 내가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서비스들이 많았고 아직도 창업할 아이템이 남았나라고 생각했던 나는 반성하게 되었다. 스타트업 업계 사람들이 보통 그러하듯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의 열의와 진지함으로 유창하게 비즈니스 모델을 PR하는 모습에서는 조금의 광기마저 느껴졌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3개월 전 스타트업으로 이미 이직한 나는 개발자 채용이 어렵다며 은근한 신호를 주는 창업자분들에게 "좋은 분 만나실 것 같아요"라는 소개팅스러운 멘트밖에 할 수 없었다.
데이팅 행사와 같은 채용자와 개발자들간의 은근한 플러팅과 서로의 재고 따짐이 잦아들 무렵 지치고 늙은 고인물들이 다시 모여 그제서야 근황 토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한 개발자 동생으로 부터 "오빠는 창업 생각 없어?"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내가 2015년에 코딩 동아리를 하게 된 것은 2014년에 했던 창업 동아리에서의 경험이 컸다. 그 당시 창업 생태계는 지금처럼 잘 갖추어져있지 않았고 창업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나에게 "세상에 내가 원하는 서비스가 없어서 직접 만든다"며 창업하는 사람들이 큰 목표를 위해 안정적인 길 보다는 위험한 길을 택한 멋진 사람들로 보였다. 하지만 모든 비즈니스 모델이 디지털에서 나오던 시절,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나는 기술을 모르면서 창업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는 알아야겠다고 배우게 되었던 프로그래밍으로 이제 내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창업은 항상 내 마음속의 어떤 의무처럼 자리잡고 있어 미룰 수는 있지만 언젠가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고 코딩을 하며 만족할 때에도 창업할 용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은근한 불안감마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창업에 대한 나의 생각은 "굳이?" 정도이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내 자신에 대해서 잘 알게되서 일 것이다. 나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부에 대한 큰 욕심도 없다. 사람들이 나를 위하게 할만한 매력도 없고 위하게 하도록 설득할 뻔뻔함도 부족하다. 의심은 많아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전파할 능력도 없다. 물론 필요하면 하겠지만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처럼 어색할 것이다. 살면서 깨달은 몇 안되는 것 중 하나는 전쟁의 승패는 전장을 고르는 것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원숭이로 났으면 굳이 물고기와 수영 경쟁을 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큰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창업이고 멋진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업 생태계는 이미 꽤 크고 너무나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 한때 "세상에 내가 원하는 서비스가 없어서" 창업하고 싶었다면 지금은 "누군가 하겠지"라는 게으른 확신이 있다. 아마 언젠가 창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꼭 내가 해야 하는 이유는 없어보인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창업을 한다면 욕심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 경험상 욕심은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와 달리 '창업을 꼭 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생각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용기란 단순히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길을 가는 것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