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같은 거 믿지 않으시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었는데도 상당한 확신의 목소리로 물어보셨다. 나는 그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께 예의 없게도 "달에 토끼가 사는 거 아세요?"와 같은 질문을 들은 얼빠진 표정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지을 것도 예상을 하신 듯 싱긋 웃으신다. 그 분이 사람을 잘 보시는건지 내가 파악하기 쉬운 사람인 건지 모르겠다. 운명도, 믿는다는 말도 나에게는 와 닿는 단어들은 아니라서 뭐부터 정의해달라고 물어볼지 고민하다 포기했다. 어차피 어떤 정의가 내려지건 나는 '운명을 믿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었다.
운명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운명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고는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설마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고 믿는지 물어보신 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인간 이성 발전의 역사를 모욕하는 그런 전근대적 발상에 충격을 받고 멀리할 사람 목록에 새로운 사람을 추가했을 것이다. 나는 사주 풀이를 앉아서 듣고 있느니 지나가는 행인에게 돈을 줄 테니 아무런 좋은 말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 질문을 긍정적으로 해석해보기로 했다. 그 질문에서 운명이라는 단어를 '필연'의 의미로 사용하셨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그 질문에 답변하기는 쉽지 않다. 필연과 우연도 명확히 정의하기는 만만치 않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필연
반드시 그렇게 되는 일.
우연
아무 인과 관계 없이 또는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
언뜻 보기에 반대 의미를 가지는 필연과 우연이 하나의 인과를 두 가지 시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시현상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만나는 인연은 우연으로도 필연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만나기 전 시점에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있어서 특정 두 사람이 만날 확률은 우연에 가깝다. 하지만 만난 후에 생각하면 두 사람 삶의 모든 요소가 그 만남을 유도하게 된 필연, 즉 운명처럼 보인다. 이는 토끼처럼 생긴 구름과 같이 사후에 이미 발생한 사건을 바라볼 때 생기는 착시이다.
사건 발생 이전에 우연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이다. 반대로 필연은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상태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정보가 부분적으로 있는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 있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을 예측하려고 할 때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50%(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상태- 정보 이론 참조)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앞면을 예측할 수 있는 정보들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동전이 어느 높이에서 어느 정도의 강도로 던져지는지, 나아가 던져질 때의 바람과 온도 등과 같은 정보를 알면 알 수록 앞면이 나올 횟수를 점차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미래의 사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량에 따라서 우연이 될 수도 있고 필연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나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적 세계관보다 이런 확률론적인 세계관이 더 마음에 든다. 미래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싫다.
나아가 발생할 미래를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입장에 있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미래에 관여할 수 있는 많은 변수 중에서 내가 가장 확신할 수 있는 변수는 나의 행동일 것이다. 미래에서 보면 모든 것이 정해졌다고 하더라도 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수집하고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하여 발버둥칠 것이다.
"To strive, to seek, to find, and not to yield."
그렇다. 나는 운명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