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씨
아까 제가 꽃을 버려서 슬펐나요?
- 네?! 아뇨 그냥...
그건 신발이 진창에 빠졌을 때만큼 슬펐나요.
아니면 가까운 이가 아플 때만큼 슬펐나요.
어떤 슬픔은 어렴풋한 슬픔이고
어떤 슬픔은 처절한 슬픔이죠.
소소한 슬픔도,
아련한 슬픔도,
잊혀가는 슬픔도,
문득 기억이 떠올라 때때로 가슴이 아파지는 슬픔까지,
같은 슬픔조차도 사실은 전부 달라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
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예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서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내가 얼마큼 슬픈지, 얼마큼 기쁜지.
내가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불행한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위한 목적을 결정하도록.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하도록.
나무도
바위도 없이
숨을 곳 하나 없는 산 복판에서
매에게 쫒기는 까투리의 마음이,
망망대해 한가운데
배에 곡식 가득 싣고,
노도 잃고, 닻도 잃고,
돛줄도 끊어지고, 돛대도 꺾어지고,
바람에 물결치고
안개는 자욱이 뒤섞이며,
사방은 어두워지고
풍랑 일 노을뜨는데,
해적을 만난 사공의 마음이,
엊그제 임을 잃은 제 마음에 비할 수 있을까요.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면
감정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의 흐름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죠.
정기 씨가 저에게.
제가 정기 씨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많은 고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와 위로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