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 2박 3일 제주에서의 회사 워크샵 마지막 날, 검정치마의 바이닐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렌터카 업체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간신히 구매에 성공했다. 들어보니 상당히 빨리 매진되었다고 한다. 웃긴 것은 집에 턴테이블도 없는 내가 LP를 산게 벌써 두번째라는 점. 사실 유튜브에 들어가면 클릭 한번에 모든 노래를 들을 수 있고 LP라고 음질이 더 뛰어나지도 않다. 얼마 안되는 음악을 꽤나 불편하게 듣기 위해서 5만원짜리 플라스틱 덩어리를 사는 것은 상당히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LP의 인기는 몇년 전부터 치솟고 있고 2021년 부터는 CD의 판매량을 넘었다고 한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인 업계에 일하는 사람으로써 처음엔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점차 나도 동화되어 가고 있다.
저번 기수 메모어 독서 모임에서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책으로 토론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책을 조금밖에 읽기 못해서 참여는 못했지만 그때 나왔던 사례들 중 하나가 LP였다. 저자는 LP뿐만 아니라 공책(몰스킨 노트), 필름 카메라, 보드 게임 등을 사례로 들었는데 이 제품들의 부흥은 단순히 잠깐의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어려울 정도로 확연하다. 제안되었던 제품들 모두 주 기능이 디지털로 대체되었고 그게 압도적으로 편하고 효율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핸드폰에 초고화질로 즉시 저장되는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는데 필름 카메라는 왜 필요하며 재미있는 콘솔, 컴퓨터 게임이 넘치는 시대에 사람들은 왜 보드 게임을 사고 있을까. 기술자로써 사람들의 이런 심리가 흥미로워서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LP의 유행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의외로 의견이 크게 갈린다. 분명 노래를 듣는 것은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가 훨씬 편하고 저렴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노래를 듣기 위해 LP를 사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추가적인 가치에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는 형은 LP는 단기적 유행은 아닐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술을 진탕 마시면서 한 이야기라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적으로 세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번째는 인테리어 소품으로써의 가치이다. 확실히 LP의 크기와 두께는 하나의 그림 액자라고 할 만큼 예쁘면서 보관하기도 용이하다. 실제로 많은 바, 식당에서 많이 활용하고 있고 가정집에서도 좋아하는 LP를 세워두면 인테리어로써 꽤 괜찮다. 두번째는 그 실물 소비를 통해서 그 분야에 대해 진심인 것을 보여주는 정체성 소비의 대상이다. 검정치마 LP를 사는 것 만큼 그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취향을 뚜렷하게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서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은 마케팅에서 오래된 상식이지만 대부분의 브랜딩과 명품 시장을 지배하고 있을 정도로 강력한 법칙이다. 현재 LP는 그 아티스트의 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감성'의 이미지 자체도 더해줌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은 현재 생산 구조상 대량생산이 어려워 희소성이 있으며 한정판은 향후 가치 상승을 노려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얼마전 친구가 3년전에 5만원에 산 장기하의 LP를 80만원 정도에 판매한 것을 보았다. 앞으로 LP의 공급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전략적으로 생산을 늘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이 유행은 일시적일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사용이 뒷받침 되지 않은 수요 자체가 불안정하고 유행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다른 형은 근본적으로 코인과 다를게 없다고까지 말했다. 지금 디지털 세대들에게 LP가 신선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편화되서 익숙해지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과소비를 하는 사람들은 없어질 것 같다. LP시장이 오래 유지되려면 명품처럼 희소성과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해야하는데 특정 브랜드가 아닌 제품군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LP가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스포츠 카드처럼 수집의 가치를 지닌 소규모 시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LP를 샀다니 사람은 참 비합리적이다.
기술 업계에 있다보면 사람들의 만족도에는 실제 기능만큼 심리적 만족이 큰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종종 잊게된다. 편의성은 확실히 중요한 가치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선택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한창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내 인생 방향을 기술을 통하여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쓰고 다녔다.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이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예전에는 이 목표를 위해서 기술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느끼는 중이다.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직접 체험하고 이해하기 위해 검정치마의 LP를 샀다고 스스로 변명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