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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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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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신나는 여행을 앞두고 갑자기 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짐을 들고 오랜 시간 멀리 갈 생각을 하면 모든 게 귀찮아져 여행이고 뭐고 집을 떠나기 싫어진다. 순간 이동 기계로 순식간에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가는 길 마저 즐거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다. 어딘가에 갈 때도 목적지까지 최대한 빨리 갔으면 좋겠다. 나에게 목적지로 가는 길은 목적지에 가는 수단으로서 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과정은 짧으면 짧을 수록 좋다. 하지만 살다 보면 종종 긴 과정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고 그때 나는 고통을 견디며 그 시간이 빨리 가기 만을 바란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꼼짝 않는 차 안에 갇혀 답답해 하던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아마 명절을 맞아 외가 친척들을 만나러 부산에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부산 할머니 집은 우리 집 보다 넓고 해운대에 있는데다가 사촌누나들도 오기로 했기 때문에 얼른 부산에 도착해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는 귀향하는 차들로 꽉 막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기 때문에 차 안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서 차 안은 점점 후끈후끈해지는 것에 비해 우리 차의 에어컨은 미약하기만 해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인내심이 없던 어린 시절, 덥고 답답한 차 안은 정말 지옥 같았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나에게 도로 위는 항상 어딘가를 기다리는 공간이었다.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도로에서의 기억들이 좋을 리 만무했다. 내가 타고 있는게 부모님이 운전해주시는 자가용이건 출퇴근 시간 만원 버스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보통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탄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영어 학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너무 긴장한 바람에 어린 손으로 버스 비를 위한 동전을 하도 꽉 쥐고 있어 나중에 손에서 쇠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그 후엔 익숙해 졌지만 버스를 타는 것은 항상 고역이었다. 버스 기사의 운전은 거칠었고 사람도 붐볐다. 지각이라도 하는 날에는 꿈쩍 않는 버스 안에서 수업 시작 시간이 5분, 10분 지나는 것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수험생이 되었을 때는 학원을 더 많이 다니게 되었고 도로에 있는 시간도 더욱 길어졌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 준비를 해야할 것들이 많았다. 항상 잠은 부족해서 학원에서 졸기 일쑤였고 밥 먹는 시간에도 공부를 해야했다. 하루의 시간이 학교 공부와 학원 공부로 나뉘던 시절 도로 위의 시간은 공부에 활용하지 못하는 낭비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종종 부모님이 학원에 데려다 주시기도 했다. 보통 부족한 잠을 보충했지만 바쁜 수험 생활 중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간혹 좋을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즐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학창 시절 전체가 도로 위에서 기다리는 시간 같다고 생각했다. 대학이라는 목적지에 가기 만을 위해서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인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눈을 감았다 뜨면 대학에 입학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끔 대학에서 흥청망청 놀 때 보다 고생해서 공부하던 학창시절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도로에서 괴롭게 기다려야 했던 시간의 기억과 감정은 어제 느낀 것처럼 생생하 지만 목적지의 도착한 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 것이다. 부산에 가서 어떻게 놀았는지 도 모르겠고 버스를 타고 도착한 영어학원의 분위기나 선생님 얼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수험 생활 동안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수업의 내용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차 안에서 부모님에게 학교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내용들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나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들은 대부분 내가 없애고 싶었던 도로 위의 시간들이다.
이렇게 보면 삶의 대부분이 어딘가로 가기 위해 도로 위에서 기다리는 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중간 목적지 도착해서 신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심지어 가끔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때도 있다. 내가 좋건 싫건 과정은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 과정을 싫어하고 무시하는 만큼 삶에서 놓치는 것들이 생길 뿐이다. 만약 과정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 목적지로 가고 싶은 내 조급함이라면 그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것도 내 마음에 달려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