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취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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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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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랫동안 못봤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 친구는 나보단 어리지만 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사회 생활을 일찍 시작하여 착실히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직을 생각 중인데 아예 새로운 직종으로 바꿀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가벼운 고민은 아닌 것 같아서 조만간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대학 졸업할 때쯤 나도 진로 고민을 깊게 한 적이 있었다. 처음 준비했던 로스쿨 입시에 실패한 뒤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그 길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그제서야 직업을 고르는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여러 매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아침부터 가슴이 뛸 정도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부와 명예보다 멋있어보였다. 나 역시 그들처럼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고 싶었다. 많은 고민 끝에 나는 기술 업계에 종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늦게 수학과 컴퓨터를 공부하기 위해 석사 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결정이었지만 당시에는 나름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나는 진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자신의 마음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응원해 주곤 한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친구의 고민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 친구는 자기 일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동시에 취미 활동도 중요하게 여겼다. 이미 여러 취미를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취미도 적극적으로 경험해 보면서 자신을 개발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취미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시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싶다고 했다. 고민의 결과 지금 커리어와는 완전히 다른 약사라는 직업이 이런 조건에 맞을 것 같아서 약사 시험에 대해서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찾도록 도와주려고 했던 나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고민의 방향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 지론과 다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를 들어보니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우선 좋아하는 일이 여럿이면 이를 모두 직업으로 삼는 것은 어렵다. 그 중 한 가지를 직업으로 삼게 되면 새로운 취미를 배우거나 다른 좋아하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될 것이었다. 또한 그 취미를 좋아해서 상당히 잘하게 되더라도 활동의 특성상 직업으로 삼기에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보장해주기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면 그 활동을 더 이상 좋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이유는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취미가 일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일은 잘해야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취미는 하다보면 잘해질 수 있겠지만 반드시 잘할 필요는 없다. 만약 취미를 잘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취미가 아닌 또 다른 일이 된다. 어떤 것을 잘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긴장이 조성 되고 그 활동을 순수하게 즐기기 어렵다. 그래서 취미 활동의 재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잘하려는 욕심을 경계해야한다. 하지만 일은 즐기는 것과 상관없이 잘 해야하기 때문에 긴장감을 가지고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그 결과 일로 하는 활동을 좋아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긴장감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지만 사람은 항상 긴장한 채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를 풀어줄 수 있는 적절한 취미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처음 코딩을 할 때는 너무 재미있어서 이걸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어떤 노력도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직업으로 삼는다면 일 외적인 시간에 취미로 코딩을 하면서 실력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코딩이 직업이 되고 시간이 좀 지나자 예전과 같은 열정은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지금도 코딩을 아주 좋아하긴 하지만 이젠 마냥 편하고 재밌게만 할 수 있는 활동은 아니게 되었다. 업무를 위해 집중해서 코딩을 한 뒤 또 다시 취미로 코딩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이런 현상이 서글펐지만 점차 좋아하는 일에만 항상 몰입하는 상태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딩을 하느라 집중한 뒤에는 다른 활동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나에게 고민 상담을 했던 친구는 약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좋은 직장을 잘 찾아서 취미로 발레, 독서, 보컬, 요리, 연기 등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심지어 잘하는 프로 취미러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모습이 나에게도 자극이 되어 그 활동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그 친구가 새로 시작하려던 글쓰기도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함께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꾸준히 하며 나의 즐거운 취미가 되어주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아마 이 친구처럼 취미를 위해 일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은 나에게 요구되는 세상의 필요이고 취미는 (세상에 요구하는) 나의 필요이다. 일을 위해 취미를 하는 삶과 취미를 위해 일을 하는 삶 중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중심에 놓는 삶은 후자일 것이다. 자신있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그 친구가 나보다 용기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