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태그
essay
long
revised
Tags
작성일자
2021/08/28
1 more property
어느 주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족들의 사진을 모아 컴퓨터에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오래전에 인화된 사진들은 모아서 업체에 보냈더니 스캔해서 파일로 돌려주었다. 스캔된 사진들이 찍힌 날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시기를 추정해서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집 청소를 하다가 오래된 앨범을 발견하고 흔히 하는 실수처럼 나도 사진을 정리하다 과거 추억에 빠져 원래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게되었다.
어린 시절의 내 사진이 의외로 많아서 신기했다. 카메라를 보며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시절의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즈음 부터 내가 찍힌 사진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그나마 찍힌 사진에서도 다소 불편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때 특별한 계기 없이 사진 찍는 것이 싫어졌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행사나 수련회를 가서도 카메라를 피해 도망 다녔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어딘가 몰래 숨어있었다. 어차피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 하나 없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학교에서는 카메라를 피해 다닐 수 있었지만 집에서는 아니었다. 집안 사정이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종종 있었던 가족 여행은 부모님이 큰 마음을 먹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가는 것이었다. 어렵게 만든 귀한 시간인 만큼 부모님은 그 순간을 충분히 사진으로 담고 싶어하셨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는 것 보다 사진이 찍기 싫은 내 감정이 더 중요했다. 몇 장은 괜찮았지만 사진을 찍는 횟수가 늘어날 수록 투덜거림도 늘어만 갔다. 그래서 결국 즐거운 가족 여행은 부모님과의 다툼으로 얼룩지곤 했다. 그때 부모님은 왜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고분고분하게 사진 찍지 못하고 별나게 구는지 이해하지 못하셨다.
당시엔 그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 찍는 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실제 감정과 관계없이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불편했다. 진실되지 못한 감정과 연기를 강요 받는 느낌이었고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 때문에 행복한 졸업식, 즐거운 여행 가운데 나타난 카메라는 메두사의 눈처럼 나를 굳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이 바보같고 남들에게 보이기 창피해서 카메라를 피해 다녔다. 가식적으로 포즈를 취하는 것 보다 그 순간을 충실하게 느끼고 기억에 남기는 것이 더 진실되게 느껴졌다. 당연히 이런 복잡한 생각을 부모님은 아실 턱이 없었다.
고분고분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 순간이 진심으로 행복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적당히 그런 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둘 다 아닌 편이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좋은 순간의 행복을 오롯이 느끼기 보다는 머리속의 어떤 생각에 몰두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행을 가서도 선크림을 깜박했다 따위의 잡생각에 꽂혀있는 식이다. 행복하게 잘 즐기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렇지 못하고 있는 내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진심으로 행복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들이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렇게 부러우면 슬쩍 그런 척이라도 좀 하면 될 것을 그게 잘 안되었다.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느낀 만큼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너만 왜 그렇게 유난이니?" 라는 압박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척을 한다면 점점 사람들에게 휩쓸려 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나는 내 의견과 감정에 대해서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표현해야했다. 그래서 가식적인 느낌에 유난히 예민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사진 찍는 것으로 부터 도망치거나 투덜거리는 것은 어린 시절 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다.
지금도 사진 찍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런 나에게 자기가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반장 선거에 자신을 추천하는 것 만큼이나 민망한 짓 같다. 그래도 프로필 사진 하나는 필요해서 카페에 앉아 어색하게 웃으며 셀카 한 장을 찍는다. 이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적당한 가식도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중심만 잘 잡혀 있다면 굳이 내 모든 의견을 세상에 강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내 의견을 꼭 내야 할 때와 그럴 필요가 없을 때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가족들과 오붓한 사진을 찍을 때는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음 번 여행에선 부모님과 함께 셀카라도 한장 찍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