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렛

태그
essay
long
revised
Tags
작성일자
2021/07/26
1 more property
나는 탄수화물을 안 먹는 키토 식단을 한지 1년이 넘어서 설탕이 들어간 탄산음료나 과자, 초콜렛 같은 간식들을 안 먹은지 좀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도 힘들지는 않은지 걱정한다. 처음 적응하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제 익숙해져 입맛 자체가 단 것을 꺼려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별로 힘들다고 느끼진 않는다. 오히려 예전에 단 것을 먹지 않으려고 속으로 갈등할 때 보다 마음은 훨씬 편해졌다.
얼마 전 야근하고 집 오는 길에 탄산수를 사러 집 앞의 편의점에 들렀다. 그날 따라 웬일인지 입이 심심해서 그래도 혹시 내가 먹을 수 있는 간식이 있을지 살펴보았다. 과자 코너에 있는 것들은 탄수화물 그 자체라서 나에게 부담스러웠고 초콜렛 코너도 단 것을 좋아하는 대중의 입맛을 겨냥해서 그런지 나에겐 전혀 끌리지 않았다. 실망하며 발걸음을 돌리는데 갑자기 익숙한 기억과 새로운 느낌이 떠올랐다. 나는 환한 조명의 편의점에서 잊고 있던 예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 기억은 3-4년 전 석사 과정을 하며 자취하던 때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고 급격하게 진로를 바꿔 진학하게 된 석사 과정 동안 좋고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지만 한구석에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만의 확신을 가지고 내린 선택은 그만큼 나 혼자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조급했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여유가 없다고 안 놀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더 사람을 찾고 술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술자리에서 왁자지껄 놀더라도 그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잠시 숨어있다가 내가 혼자 되었을 때를 노려 더 커져서 돌아올 뿐이다.
내 자취방은 역이나 번화가에서 좀 떨어져 있었다.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컴컴한 골목길은 숨어있던 불안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좋은 장소였다. 이대로 비어있는 자취방까지 간다면 불안이 자기 전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 뻔하기 때문에 다시 불안을 잊게 해줄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보통 내가 선택하는 것은 술이나 과자, 초콜렛 같은 주전부리를 사서 방에 가져가 내가 더 생각을 못할 정도로 취하거나 배부르게 먹은 뒤에 바로 잠드는 것이었다. 듣기만 해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습관인데다가 실제로 다음날 속도 부대껴서 항상 후회하는 행동이지만 집 앞 불을 환하게 밝힌 편의점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다.
술에 조금 덜 취했던 어느 하루는 이 유혹에 저항해 보기로 하였다. 충분히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맥주는 마셔야겠지만 안주라도 참는다면 이 안 좋은 습관을 해결하는 좋은 첫걸음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술을 마시면 달달한 것이 더 땡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콜렛 코너에 진열된 달다구리들이 왜 그렇게 매혹적이었는지 모른다. 집엔 아무도 없으니 나만 눈감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는 악마의 유혹과 이제 정신좀 차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이성의 줄다리기는 제법 팽팽해서 현실 시간으로도 한참이 걸리곤 했다. 알바생도 야밤에 혼자 반쯤 취한 채로 초콜렛 코너를 흘끗흘끗 훔쳐보며 수 십분을 서성이는 사람을 보며 수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초콜렛을 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생각과 기분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떤 행동이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안을 잊기 위한 대부분의 행동은 결국 후회로 돌아오곤 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이 미래에 쉬워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어려웠다. 초콜렛을 먹지 않는다는 조그마한 선택지도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앞으로 삶에서의 선택들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만해도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조그마한 선택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내가 세상에서 뭐하나 제대로 이룰 수 있을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퇴근 길 초콜렛 코너를 보며 떠올랐던 것은 그때의 기억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외로웠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 살며 직장을 다니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세상의 험난함을 떠올리게 했던 편의점 초콜렛 코너는 이제 없다. 이렇게 다른 상황과 감정으로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을 우연히 봤는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힘든 감정들도 결국 뒤돌아 보면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편안했다.
오늘 하루 쯤은 괜찮을 것 같아 초콜렛을 사서 집에서 먹어보았다. 여전히 달고 맛있었다. 지금은 지금 나름대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힘든 감정들과 선택들이 있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이 감정들도 언젠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여유는 생긴 것 같다. 그렇다고 힘든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나아질 수 있다는 달콤한 희망을 생각한다면 그럭저럭 버틸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