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

태그
essay
short
Tags
작성일자
2021/06/01
1 more property
자연에 사계절이 있듯, 사람에게도 주기가 있다. 이 주기에 따라서 사람의 상태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이는 마치 파도와 같아서 일정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주기는 파도의 파동처럼 모든 상태가 연속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가장 극단의 상황만 두드러져 기억에 남는다. 이 양 극단에 있을 때 독특한 점은 여름과 겨울에 있을 때처럼 한쪽에 있을 때는 다른 한쪽이 잘 기억하지 못하고 그 순간이 영원할 것 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파도의 마루(꼭대기)에 있을 때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치고 세상은 아름다워 보인다. 이 시기에는 일찍 일어나 방을 청소하고 삶을 계획하며 목표를 세운다. 또한 운동 기구를 사고 카페에 가서 미루어 왔던 해야할 일들을 처리하며 친구들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 때 세상은 예측이 가능하며 살만한 가치가 있고 내 삶은 희망으로 넘치는 것 같다. 이러한 의욕으로 삶에 대한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며 그를 달성하기 위한 루틴과 계획을 설정한다. 그리고 몇 일 동안 만들어 놓았던 계획을 초과 달성하며 생각보다 목표를 일찍 달성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에 들뜨며 혹시 루틴을 너무 쉽게 설정해 놓은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하지만 파도가 그러하듯, 마루는 지속되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아 보였던 이러한 의욕은 어느순간 곤두박질쳐 파도의 골(바닥)을 만나 말그대로 '골로 가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계기를 당시에 포착하는 것은 어렵다. 단지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점을 떠올려보며 추측해볼 수 있지만 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기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온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늦게까지 침대에 뻗어있고 방은 엉망이 된다. 과식을 하고 술을 마시며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은 커녕 오는 연락조차 답변하지 않는다. 이 때의 세상은 혼란스러울 뿐이고 무엇을 왜 해야하는지에 대한 의욕은 초토화되어있다. 마치 파도를 타다가 마루에서 넘어진 사람처럼 균형은 커녕 다만 숨길을 찾기위해 허우적댈 뿐이다.
이 때, 마루에 세워놓았던 원대한 목표와 계획들은 성난 파도에 휩쓸리는 해변가의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진다. 아주 공들여 지어놓은 모래성이라고 하더라도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간신히 그 흔적만 남을 뿐이다. 그 초토화된 자리를 보며 파도가 밀려올 해변에 모래성을 세운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감탄한다. 의욕 넘치게 모래성을 만들던 때의 나는 무기력한 지금의 나와 너무도 괴리감이 들어서 자아의 연속성에 대해서 의심하게 된다. 이 쯤 되면 사두었던 운동기구를 슬며시 창고로 보내고 다이어리에서 계획을 세워두었던 부분을 뜯어버린다. 내가 세워둔 질서는 무참하게 파괴되어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이 골도, 어느샌가 다시 바뀐다. 이 계기는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길을 걷다가 턱을 만나 곤란을 겪고 있는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를 돕게 되서 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마카롱일 수도 있으며 그냥 날씨가 선선해서 잠을 깊이 잘잤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계기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다시 바뀐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되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황폐해 보였던 그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싹트게 된다. 무언가 다시 재미있어 보이고 의욕이 생기며 목표를 세우고 싶어진다. 근데 신기한 것은 이번에는 아주 바닥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보였던 그 황폐한 해변에 저번에 만들던 모래성의 터가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것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반으로 저번보다 조금 더 나은 모래성을 짓는다. 저번과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무너졌기 때문에 다시 만들 수 있으며 파괴로 인하여 더 나은 창조가 태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