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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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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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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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설 순 없으니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나는 종종 하나의 노래에 꽂혀서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곤 하는데 요즘 꽂힌 노래는 '달리기'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여러번 리메이크 된 것 같은데 가장 처음엔 윤상(2000), 그 다음 SES(2002)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은 옥상달빛(2016)의 버전이다. 최근 비긴어게인(2020)에서 이하이와 이수현이 다시 부른 버전도 유명하다. 이 노래는 수능 응원곡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옥상달빛 버전 전에 수능을 치른 나로써는 알길이 없다. 나는 여러 버전중 옥상달빛의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옥상달빛의 목소리는 힘들고 고달픈 삶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느낌이 난다.
나는 보통 노래를 들을 때 가사를 잘 듣지 않는데 이 노래는 가사도 복잡하지 않고 반복되어 유난히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달리기, 혹은 경쟁에 관한 위로의 노래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쟁에 관한 비유라고만 생각하면 묘한 부분들이 보였다. 첫번째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이라는 부분인데, 우리가 경쟁사회에 있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갑자기 시작하는 경쟁은 드물다.
두번째 요소가 더욱 걸리는데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이라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약속이 두 가지가 아닌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게 약속을 할 만큼 강조할 만한 부분이라는 것이 이상했다. 대부분의 경쟁은 끝이 있긴 하지만 약속을 할 만큼 명백하진 않다. 또한 끝난 뒤에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수 있는 경쟁은 더욱 드물다. 삶은 경쟁의 연속이며 하나의 경쟁이 끝난 후에 잠시 휴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충분한 휴식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하는 경쟁은 인생이다. 각자의 인생은 자발적으로 시작되지 않고 그냥 시작해버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삶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끝이 있고 오직 죽음만이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추론이지만 노래의 따뜻하고 경쾌한 멜로디 때문에 이 노래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노래가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인 것 같다.
이 노래의 달리기를 인생으로 생각하고 다른 부분을 해석하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러너스 하이와 같은 달리기의 즐거움에 대한 부분은 전혀 없고 인생은 '지겹고 힘들고 숨이 턱끝까지 차는' 일이며 단 하나 보장된 것은 끝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 대한 상당히 비관적인 관점이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관점이 마음에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좋은 때가 있다거나 함께하는 사람들을 보며 힘내자와 같은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삶의 고통이 긍정적인 시각이 없는 내 탓인 것 같아서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차라리 인생은 원래 모두가 힘들다는 관점이 더 진정성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힘든 삶을 뭐하러 끝까지 달려야할까?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달리는 내내 힘들기만 한데다 유일한 장점은 끝난다는 것이다. 이런 비관적인 묘사가 있으니 이 노래가 자살에 관한 노래라는 소문이 있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도 노래속에 들어있는데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설 수 없으니'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자살을 나쁜 일이라고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창피한 일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따뜻한 어조로 자살을 지지하지 않는 표현을 하는것이 정말 놀랍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몰렸을 때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라와 같은 논리적인 설득을 들으면 오히려 오기만 생길 것 같다. 나는 죽어 사라질 건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차라리 다들 힘든데 나만 이런 유난을 떠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하고 멋진 메시지를 이렇게 짧은 가사에 담아 표현할 수있는 작사가가 대단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