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꽤 즐겨보는 편이지만 의외로 한국 영화는 잘 보지 않아서 친구들이 사대주의라고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 얼마 전 회사 창립 11주년을 기념해서 다 함께 영화관을 빌려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사팀이 선택했던 영화는 '비상선언'이었다. 그리고 나는 왜 그동안 한국영화를 잘 보지 않았는지 기억이 났다. 바로 신파 때문이었다.
신파를 간단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내가 불편해하는 신파의 본질은 '편리한 감동'이다. 작품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감동을 몇 가지 장치를 통해서 안일하게 전달하려는데 있다. 신파는 특히 쉽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 슬픔을 자극한다. 슬픔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 중 하나이지만 그만큼 강력하여 이용되기도 쉽다. 신파는 마치 온갖 요리에 라면 수프를 넣듯이 간편하면서 효과적이다. 라면 스프가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선한 재료, 좋은 요리의 깊은 맛을 가린다.
좋은 영화는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캐릭터, 사건, 관계를 치밀하게 구성하여 차곡차곡 감정선을 쌓아올린다. 하지만 신파는 몇 가지 공식으로 쉽고 빠르게 관객의 슬픔을 자극한다. 너무나 비극적인 상황에 슬픈 음악이 깔리며 인물들은 과장된 감정 표현으로 대사를 길게 이어나간다. 관객을 반드시 울리고 말겠다는 듯이 과잉, 반복, 억지를 남용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몰입했던 캐릭터는 슬픔을 주기 위한 장치로써 고통당하고 소비된다. 일단 관객이 울음을 터뜨리면 그 장면의 개연성이나 그 동안 영화의 낮은 완성도는 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알고 죽기 직전에 어린 딸이 그 순간에 도착하는지, 다른 조연들과 달리 죽어가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할 이야기를 다 하고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리고 작품 전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할 메세지는 이런 장면 속에서 몇 마디 대사를 통해 손쉽게 전달된다. 예술의 해석은 감상하는 사람들의 몫이어야 한다. 느껴야할 감정과 시점을 정해주고 메세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예술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관객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이렇게 특정 감상을 강요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신파 장치들은 수없이 반복되어 이제는 그 흔적만 나와도 오히려 몰입이 확 깰 정도이다.
'비상선언'도 중반까지 괜찮았지만 후반에 신파를 연출하려 슬픈 노래가 나오기 시작할 때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신파를 연기하는 것을 보며 연기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호화 캐스팅과 제작비를 투자한 투자사 입장에서 대중성을 추구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놀랍게도 한국의 이런 신파요소는 아직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매우 효과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좋은 작품을 통해서 감동을 전달할 수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신파가 계속되어 반복되는 이유는 그만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신파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해서 그 감정이 가짜 감정인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감정에는 수 많은 결이 있다. 영화는 다양한 인물에 이입하여 그런 다양하면서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예술이다. 모든 요리에 라면 스프만 넣어서 먹다보면 느낄 수 있는 깊은 맛들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